[만남] 기록, 오늘을 만나다 / 이기진, 물리학자·서강대 교수

내 캐시 : 0 캐시

총 결제 캐시 : 0 캐시

사용후 캐시 : 0 캐시

아티클
문화 예술
[만남] 기록, 오늘을 만나다 / 이기진, 물리학자·서강대 교수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며칠 전, 실험실에서 실험하던 중 선반 위의 실험 장치가 갑자기 안경 위로 뚝 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경은 바닥에 떨어졌고 눈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안경 덕분에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눈에 붉은 충혈이 생겼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책상에 앉아 있다 보니 문득 ‘물건들이 나를 공격하는 나이가 되었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조교가 불안했던지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학교 앞 안과에 들렀다. 

안과에 도착해 프런트에 이름을 말하자 뒤쪽 흰색 선반에서 누렇게 바랜 차트를 꺼내 내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진찰대에 앉자 의사 선생님이 차트와 나를 힐끔 보며 “31년 전에 오셨군요!” 한다. “그때 내가 안경을 맞춰드렸는데, 지금은 어떤지 한번 봅시다” 하더니 시력을 재고 안경 도수를 확인한다. “그때 안경 도수가 엉망이어서… 지금 안경은 문제가 없네요.” 

31년 전이면 내가 일본에서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대학에 돌아온 직후이다. 아마도 유학하는 동안 눈이 나빠졌는데도 안경을 바꾸지 못한 채 계속 쓰다가 뭔가 이상이 생겨 안과를 찾았을 것이다. 30대 때 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정신없던 시절이었다. 부족한 공부를 해내면서 두 명의 아이들을 키워내야 했고 이국의 생활에도 적응해야 했으며 불안한 미래를 밤낮으로 걱정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내게 안경 하나 바꿀 시간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바쁘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고 얘기하고 싶다.  

“지금도 학교에 계세요?”라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다. 기억을 더듬으니 앞에 있는 나이 드신 의사분의 30년 전 모습이 기억났다. 지금보다는 더 기운차고 높은 목소리를 가진 젊은 의사. 요즘은 며칠 전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신기하게도 먼 옛날 일들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의사 선생님은 충혈된 눈을 보더니 “문제는 없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2주간 술 마시지 마시고, 제때 안약을 넣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누렇게 바랜 차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오늘의 이 순간을 기록한 차트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실험실에서 부상당한 이야기와 지금은 그래도 도수가 맞는 안경을 쓰고 있고(그래서 다행이고), 아직 학교에 남아 있다는 기록이 담겨 있을까? 의사 선생님은 프런트에 차트를 전해주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학교 언덕을 오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기록이 30년 전 종이 차트에 남아 있다니. 그것도 딱 한 번 간 병원에. 종이의 힘일까.’ 내 연구실 책장 선반에는 유학 시절 쓴 실험 노트들이 버려지지 않고 아직도 꽂혀 있다. 버려질 수 있는 물건이지만 몇 번의 이사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매일매일 실험을 하면서 그날 날씨와 실험 데이터를 적어놓은 페이지, 데이터를 정리한 그래프를 풀로 붙여 놓은 페이지…. 너널너덜해진 페이지, 커피를 엎질렀는지 누렇게 물든 페이지, 뭔가 모를 낙서를 잔뜩 한 페이지도 있다. 

예전에 학회 참석차 폴란드에 갔을 때 마리 퀴리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그녀의 실험 도구에서부터 사용했던 지갑, 안경과 같은 일상용품과 함께 실험 노트도 전시되어 있었다. 마리 퀴리는 36년간 방사선 연구를 했다. 열악한 실험실에서 방사성 광물을 수집하고 농축하는 일을 자신이 직접 했다. 방사선의 위험성을 아무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실험 노트뿐 아니라, 그녀가 부엌에서 요리할 때 보던 손때 묻은 요리책 역시 10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이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를 보면서 남아 있는 방사선이 살아 방출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당시 그녀에게는 실험 노트와 요리책이 중요한 삶의 일부였으니. 마리 퀴리가 직접 쓴 실험 노트를 보니 그것을 기록한 이의 존재가 더 구체적으로, 더 생생하게 확 다가왔다. 그녀가 실험 노트를 적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기록이란 이토록 직접적인 힘을 지녔다. 

요즘에는 실험 노트를 쓰지 않고 있다. 모든 실험 결과를 컴퓨터에 집어넣고 그 데이터를 이용해 그래프를 만들고 논문도 컴퓨터로 쓰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실험 기록이 컴퓨터에 담겨 있다. 컴퓨터 하드 디스크가 날아간다면 많은 부분이 증발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세상이 변한 것을. 이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남아 있게 될 것들은 인터넷에 남은 디지털 기록들이 아닐까. 물리학자인 내 경우에는 저널에 발표한 논문과 여기저기에 발표된 글들이 될 것이다. 

안과 의사 선생님이 볼펜으로 꼼꼼히 뭔가를 적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삶을 기록하고 성실하게 뭔가를 남기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중요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아날로그, 디지털 매체, 그 어느 것이 의미 있고 없음을 떠나 하루하루의 충실한 삶의 기록 그 자체가 소중한 만남이자 가치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안과에 보관된 내 차트에 더 이상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뭐 내 뜻대로 되겠는가. 

*1960년 출생. 서강대학교 이학 학사, 석사, 박사. 일본 쓰쿠바대학교 물리학 문무교관(1993), 일본 도쿄공업대학 응용물리학과 문무교관(1995). 저서로는 <MT 물리학><박치기 깍까><보통 날의 물리학><서울 꼴라쥬> 등 다수. 現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포스트 공유하기     
모든 저작권은 해당 콘텐츠 제공자 또는 해당 콘텐츠 제공자와 북팁이 공동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콘텐츠의 편집 및 전송권은 북팁이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의 팁


관련 분야 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