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혹은 우주정신의 습숙習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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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혹은 우주정신의 습숙習熟
  • 출판사시문학사
  • 잡지명시문학


 


바람, 혹은 우주정신의 습숙習熟
   - 시집 『바다를 밀어올린다』를 중심으로

 


안수환 (시인)


1
시가 인간정신의 상승을 결정짓는 책력almanac이라는 말은 케케묵은 이야기다. 시는 도리어 인간정신의 돌올突兀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생존에 이로운 여러 장점들을 가학적加虐的으로 억누르면서 그에 대한 슬픈 대가를 치르도록 재촉한다. 삶이란, 그것이 진실한 실질일지라도 어느 정도 유기遺棄된 미세포 소관의 미발未發 속에서 숨 쉬고 있지 않았던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얼금숨숨 결정론자들이 말하는 불변의 잇속이 있기는 있다[즉, 반론의 여지없이 콩은 콩깍지와 상관한 규칙만을 따라다닌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규화 시인의 시공 안에 드러난 삶의 액정液晶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화氣化의 연접들이었다[물론, 시인에게는 물질덩어리들의 역운逆運도 있다. 이때 그의 시는 경건에 휩싸인다; “맑고 깨끗해진 거울이 나를 받아들이다가/ 거울이 나를 본받아 흐려지다가/ 흐려지면서 검게 물든다/ 검은 거울이 겹겹이 쌓여서/ 다시 나를 찾아와 검은 눈물이 된다// 물은 어딘가로 흐르고 흘러서/ 분노를 보듬어 안으면서 상처를 주지 않는다// 상처를 주는 것은 폭풍/ 분노하는 것은 벼락/ 상처를 받으면 물은 내 집을 침수시킨다”(「인식의 둘째 단계」)]. 좋은 시인은, 인식의 궤도를 쫓되 대부분은 유추類推[즉, 추측]의 불확정성에 다리를 놓는다. 이때는 철학이나 양자 물리학의 공리公理들이 그의 문맥을 관통한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 「동글동글」을 이렇게 쓴다;

 

두 눈썹을 모으며 위아랫니를 앙다물고
킁킁거리며 앙앙거리며
이마에 내천(川)자를 그린다
내천자를 그릴 때
검은 그림자도 함께 그린다

 

내천자도 지우고
검은 그림자도 지우고
뜰 아래 연꽃 바라보듯이
뜰 아래 연꽃 바라보듯이
그래서 가슴이 너글너글해지면
새의 노래가 들린다

 

새의 노래는 물방울같이 동글동글하고
동근 노래를 들으며 연꽃은 핀다

 

“동근”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찌 “연꽃”만을 두고 하는 말이겠는가. 지구도 동그랗고, 우주도 동그랗고, “물방울(도) 동글동글한” 근원을 그린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는 게偈가 있지 않은가(의상義湘 625년~702년 『법성게法性偈』). “동근” 것을 보게 될 때는, “새의 노래가 들린다”. 어찌 새의 노래뿐이겠는가. 이 세상 모든 실체의 환원까지도 보게 될 것이다. “동근” 것은, 결국은 ‘이승-저승’의 일관된 자활自活까지도 한꺼번에 포용하는 포명佈明을 두고 하는  말이다[즉, “나무는 나이를 먹으면서 몸을 둥글게 한다” (「평생 나무」), “햇덩어리가 목덜미에서부터 갈가리 손가락 펴고/ 강과 바다를 오래 만지다가/ 맑은 눈물만 걸러서 하늘로 가져간다” (「비의 일생」), “속이 텅 빈 공이 둥글게 둥글게 논다” (「공」), “때로는 공 하나를 붙잡고 오래오래 굴리면서 / 몽상을 하지만 몽상은 공보다 모퉁이가 없어” (「늙정이」), “바람이 불면 회화나무 가로수가 부러질 듯/ 멈춰서려는 시간도 보인다” (「‘한’자 풀이」), “합창을 할 때는 입술을 둥글게 둥글게 한다/ 둥글다는 말 속에는 크낙한 웃음이 들어 있다” (「소리가 흐른다」) 등등]. 이른바 인도 사상에서 말하는 윤회설輪迴說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리그베다Rigveda』 ). 허나, 원효元曉 (617년~686년)는 윤회의 굴레야말로 한 마디로 말해 일심一心에 대한 미혹이라고 가르쳤던 것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어쨌거나 이곳에서 시인이 들여다보고 있는 “동근 노래를 들으며 (피는) 연꽃”은, 마치 명경明鏡과도 흡사하게 반야般若 prajna의 구면球面으로 떨어지는 자성自性 intrinsic nature이었던 것. 사랑도 불심도 기다림도 자유의 표상까지도 저와 같은 “동근” 원의 표상으로 조합된다. 시인의 의식은 이때 원융의 체액體液을 가슴 깊이 적셔낸 뒤 그 메커니즘의 조정調整을 한껏 적용해 나가고 있었던 것[즉, “내천자도 지우고/ 검은 그림자도 지우고/ 뜰 아래 연꽃 바라보듯이/ 뜰 아래 연꽃 바라보듯이/ 그래서 가슴이 너글너글해지면/ 새의 노래가 들린다”]. 그의 “연꽃”은, 그러므로 구도행의 비방祕方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타자[즉, 우주]와 나는 “동근” 원의 회향回向 prinama으로 연결되면서 인식론적으로는 그 관련이 객관화되는 현상을 띠고 있었던 것. 이것[이를테면, ‘바다’]과 저것[이를테면 ‘강’]이 하나가 되는 통합은, 현실과 비현실이 한 몸이라는 점을 꿰뚫어보는 후지厚志였다. 이는, 곧 무無와 유有의 간극을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는 정관법의 영효靈效였던 것. 이때는 비로소 시인의 견성見性을 통해서, 세계가 먼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으리라.

 

2


김규화 시인은 자기의식의 섭생에 관한 밀의를 과도하게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그의 정의情意는 온건했으며, 무한함에 대한 그의 통찰은 간단명료했다. 내 눈에 띠지 않는 이상, 자연 속에 숨어있는 본질을 굳이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어디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은, 시인이 포섭해야 할 시적 긴장으로서의 의미일 뿐 내 손안에 쥔 순명順命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을 바라보는 그의 세계관에도 한순간의 침음沈吟은 있게 마련이었다 [즉, “누에가 눈을 감고 뜨지 않는다/ 몸에 밴 슬픔을 잠 속에 가두어 놓 / 깊은 밤 미명未明으로 빠져들어간다/ 달콤한 꿈을 불러들여 무자맥질하다가/ 칠흑 밤하늘에 빠뜨리기도 한다” (『누에의 넉잠』)]. 그는, 기다림에는 이골이 난 과객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꿈꾸어 온 덕량德量들에 대한 호응보다는 일상세계의 덧없는 역설들에게 비교적 꼼꼼한 응답을 건네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 「거문고」를 또 이렇게 쓴다;

 

당신이 나를 두드릴 때는
뒤숭숭하게 두드릴 때는
나는 볼멘 소리를 낸다

 

당신의 손이 오르락내리락
감정의 줄을 고를 때는
단지 황홀해서 몽당이로 서 있다

 

당신의 일기예보를 찬찬히 보며
당신이 흐리면 따라 흐리고
내 눈썹을 짓누르는 만큼이나 흐리고

 

당신이 고개를 돌리는 쪽을 향하여
당신의 얼굴을 따라간다
나의 노래는 당신을 따라 나선다

 

강은 이미 대지를 무르게 해놓은 액체
강은 이미 주름살 지으며 흘러가고
강의 바닥은 강의 맨밑에 누워서
대지의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안간힘 한다

 

찌는 무더위 속에서 우물에 두레박을 내린다
우물이 출렁이고 가슴이 출렁인다
나는 두레박의 물을 마시고 입을 훔친다

 

좋은 시는, 대상을 만나되 대상과의 경계를 허물고, 그 대상의 자장磁場을 끌어당긴 후 내 마음 건너편 다른 절망切望의 배후까지도 간절히 품어 안는다. 그러다가는 기진해지면 초자연적인 존재질서의 세라핌seraphim을 찾아가 그분의 인광燐光 앞에서 내 몸을 다시 추스른다. 그분이 강물이라면, 내 몸은 강바닥 맨밑에 누운 물결일 뿐이다[즉, “강은 이미 대지를 무르게 해놓은 액체/ 강은 이미 주름살 지으며 흘러가고/ 강의 바닥은 강의 맨밑에 누워서/ 대지의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안간힘 한다]. 시인은 이렇게 쓴다; “당신이 나를 두드릴 때는/ 뒤숭숭하게 두드릴 때는/ 나는 볼멘 소리를 낸다”. 또다시 “당신” 앞에 설 때는 “나”는 “몽당이”가 된다고 토설한다. 이토록 슬픈 사랑[즉, 진혼鎭魂]이 어디 있을까. “당신”과 내 자신의 인연이란, 기투企投와 변이變移의 관계[즉, 『주역』의 괘상卦象으로 본다면, 기제旣濟 (완결성) 뒤꼭지에 미제未濟 (미완결성)가 붙는다]로 이어지면서 거듭거듭 나는 갱생한다. 그렇더라도 (내) 갈증은 여전했다[즉, “찌는 무더위 속에서 우물에 두레박을 내린다/ 우물이 출렁이고 가슴이 출렁인다/ 나는 두레박의 물을 마시고 입을 훔친다”]. 아프다. 좋은 시는, 그렇게 사물의 님프들[즉, “거문고”면 거문고, “강”이면 강, “우물”이면 우물]이 춤을 추는 춤사위를 본받으면서,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남모르는 내상內傷을 간직한 시인일수록 그의 노래는 처연하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사물의 직핍直逼한 개념을 덜어내고 인식의 현전화現前化[즉, 자의自意]를 크게 늘려 놓은 것은 누구에게나 본받을만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현실 변용變容의 시간성을 우주정신의 개연蓋然으로 연결해 놓은 점 또한 본받을만한 일이었다. 시인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언제든 감정의 솟구침을 누르고 자기 자신의 위의威儀를 지켜낼 줄 알아야 한다. 그의 꿈은, 어쨌든 시간의 자기회복 직전直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3 


시인이 느끼는 세계이해의 존재론적인 관점은, 신神이 펼쳐놓은 의미의 처소[즉, 어떤 사실들의 집합]에 있지 않고 언제든 그 자신이 먼저 말을 건네던 시간과의 따뜻한 화해和解에 있었다. 그의 의식은 사물들의 후면으로 건너뛰지 않고, 항시 내 눈 앞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해석을 문제 삼는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 쳐다보는 일별로 대상들의 존재형식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좋은 시는, 그러니까 내 마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한한 허공의 점멸點滅들에게 복무하지는 않는다[즉, 세계는 상대적인 보편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 「눈에 보이는 보석을 만들려고 하네」를 또 이렇게 쓴다;

 

마음 속으로 골백번을 다짐하네
행동은 하지 않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오직 황금알을 낳으려고
골백번을 다짐해 보네

 

이제는 눈에 보이는 보석을 만들려고 하네
보석은 눈에 잘 뜨이네, 금·은
다이아몬드·사파이어
눈에 보이는 건강
눈에 보이는 가우디성당―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내가 너를 좋아하여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너도 내 심장의 두근거림을 듣지 못한다면
영 태어나지 않는 보석을 누가 알까

 

손은 약한 바람을 눌러버리네
바람은 손으로 하여 묻혀버리네

 

산봉우리의 둥그러움을 보며 내 키는 커가네
눈 오는 겨울 한낮의 정적 속에
금방 저녁이 찾아오네
바이올린 줄이 팽팽해야 고운 소리가 나네

 

나는 보석 한 줌을 들고 전동차 홈에 서 있네

 

이 시는, 재보財寶가 무엇이며 또 어디 있는가를 쉽게 알려준다. 삶에 대한 그윽한 학습이 또 어디 있는가를 알려준다[즉, “내가 너를 좋아하여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너도 내 심장의 두근거림을 듣지 못한다면/ 영 태어나지 않는 보석을 누가 알까”]. “보석”은 어디 있는가. “보석”은 내가 만든 보석이라야 그것이 진짜 보석이라는 것이었다. 정신은 자기의식의 광자光子를 끌어안고 날마다 성장한다. 그러다가는, 그 자기의식은 마침내 감정의 순치馴致를 통해 경건해진다. 그와 같은 순치의 단백질 속에라야 시인이 지금껏 찾아 헤맨 “보석”의 물목이 들어앉게 된다. 시인이 “만드는” (“눈에 보이는”) “보석”의 용량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인생사 “둥그러움”의 증험證驗이었던 것이다. 증험은 증험이로되 “이제는 눈에 (잘) 보이는” 행동규범이어야 했다[즉, “나는 보석 한 줌을 들고 전동차 홈에 서 있네”]. 그렇더라도 내 몸은, 때때로 내 자신이 아닐 때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러니까 얼른 보아도 내 마음만 홀로 용립해 있는 자존감이 아니지 않는가. 자기의식의 팽만한 원둘레는, 먼 하늘이 내게 준 우주적 기강의 징표가 아니었던가. 그랬다. 나는 만물과 더불어 내 자신을 아우르는 복수複數로서의 대자對自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여전히 나 홀로 외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될 인간정신의 비번非番이었던 것. 시인이 “보석”을 찾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그의 “보석”은, 그러므로 무한에게 새삼스럽게 초청장을 띄울 것도 없는 우주정신의 편재遍在였던 것이다.

 

4


신神을 보려거든, “바람”을 보면 된다.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는, 그런데 이 세계의 정면에는 신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무한에 대한 두려움 속에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있기 때문이다[혹여, 상징의 음각陰刻이 신이라면 몰라도].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 「바다를 밀어올린다」를 이렇게 쓴다;

 

바람에 삭인 하얀 얼굴을 들어올리며
원망이 살갗에 반점을 만든다

 

꽃을 사랑하지 않고
슬픔을 달덩이 같이 품고
웃음을 멀리 하고
고마움은 개울을 건너다 빠뜨려버리며

 

가슴에 품고 있던 말들을 토해내면
원망이 다시 일어선다

 

겨울비를 맞으며
가로수 밑을 걸어가는 원망이
나목들 앞에서 춥고
온기는 멀리 낭떠러지까지 밀리어간다

 

냉수로 세수한 맑은 얼굴의 수녀가
해변을 동글게 감싸면서
바다를 밀어올린다

 

물거품을 터뜨리고는 말이 없는 원망

 

시인이 바라본 바다의 위용威容은, 그러나 해신海神이면서도 해신 같지 않은 서글픈 낯빛을 띠고 있었다[즉, “바람에 삭인 하얀 얼굴을 들어올리며/ 원망이 살갗에 반점을 만든다// 꽃을 사랑하지 않고 / 슬픔을 달덩이같이 품고/ 웃음을 멀리 하고/ 고마움은 개울을 건너다 빠뜨려버리며”]. 어느 순간, 그러나 “바다”는 바람에 휩쓸리면서 원기를 회복한다[즉, “냉수로 세수한 맑은 얼굴의 수녀가 / 해변을 둥글게 감싸면서/ 바다를 밀어올린다”]. 시인이 말하는 “수녀”는 “바다” 한복판 물결 속에서 물결과 함께 춤을 추면서 “물거품을 터뜨리는” 그런 해신이었다. 다시 한 번 쳐다보자. “슬픔을 달덩이같이 품고” 있는 그분은 누구인가. 그러니까 그동안 “바다를 밀어올리고” 있던 그분의 원심력은, “바람”의 늑골肋骨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어떤 글에서 바람의 품성에 대한 소견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입 다물고 있는 바람의 지향점은 사랑[즉, 순결한 충동]이었다. 사랑은 바람처럼 분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바람을 보면, 내 마음은 벌써 당신의 풍요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의 마음은, 그런데 일곱 가지 정情으로 쪼개진다. 칠정七情이 그것이다[이른바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이 그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의 마음은 도덕적인 덕목을 필요로 하게 된다]. 누구든지 마음을 함부로 바꾸게 되면, 그때부터 악이 찾아온다” (『주역시학』). 칠정이란, 바람의 기화현상이었다[즉, 풍기風氣/ 궐음厥陰의 별자리 『소문素問』 「천원기대론天元氣大論」]. 그렇다면, “바다”의 물결과도 같은 정신의 문은 언제 열리는가. 그럴 때는, “물거품을 터뜨리고는 말이 없는 원망”[즉, 침묵]이 내 마음결로 깊숙이 파고 들어와야 하리라[즉, “가슴에 품고 있던 말들을 토해 내면/ 원망이 다시 일어난다”]. 그런 다음에라야 나는, 비로소 내 정신의 소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않겠는가.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유상有相 / 무상無相’과 ‘비유상非有相 / 비무상非無相’의 적멸寂滅[즉, 고요]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3품).

 

5


무신론자가 아닐지라도, 시인은 소멸[즉, 침묵]을 마음속에 넣고 세계를 바라보는 자라야 한다[즉,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년경~BC 399년경)는 “너 자신을 알라”고 부추기고 있지만, 실은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몸의 상실은 곧 정신의 부재를 드러내는 근거일 것이다. 먼 하늘은 언제나 몸뚱어리 건너편에 죽음을 세워 놓는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텅 비어 있으나/ 하늘의 별들은 원만하게 리듬을 타며/ 움직이지 않는 운동을 한다// 우주는 우리에게 어머니를 되돌려준다/ 나는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움직인다/ 바람이 나에게 그늘 한 점을 보낸다// 그늘이 내 흰옷의 윗도리에 떨어지고/ 나는 그늘 한 점을 죽은 심장처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닌다” (「어머니는 우리를 운반해 간다」). 이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예찬한 게송偈頌이다. 과학철학은 몸을 중시한다. 시인은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몸을 잠자코 건네다 본다[즉,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서 있다” (「죽을 문제 살 문제」)]. 그렇다면, 다음의 절품을 또 읽어보자; “마음 속에 신(信)을 떠올리거나/ 믿어 잠재우는 일은/ 절반 이상의 운을 움켜쥐는 일// 신을 떠올리지 않거나/ 마음 속의 의심은/ 열 손가락을 소심하게 만드는 일/ 두 발목의 힘을 빼놓는 일// 신은 올바른 깃대 위에 매달린 깃발이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날린다/ 바람은 신을 낳는 어머니다” (「신信」). “바람”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신을 낳는 어머니”였다. “깃발”이었다. “신信”이란, 내 자신이 당신의 몸과 우주와의 통섭通涉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인지행위로서의 내포를 의미한다. 이 믿음의 결곡함을 최초로 선포한 인자人子는 아마도 예수이리라[즉,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신약』 「마태복음」 17:20)]. 물론,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 수는 없다 (「누가복음」 4:3). 그렇더라도 그 돌멩이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으면, 베드로의 반석이 되지 않았던가 (「마태복음」 16:18). 시인은 다시 다음과 같은 시 「죽을 문제 살 문제」를 이렇게 쓴다;

 

죽을 힘을 다해서 죽을 문제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 문제를 생각한다
한숨을 버리고 푸념을 버리고
그러나 어쩌다가라도 예사롭지 말고

 

죽은 나무에 꽃 피울 생각을 한다
고목 둥지에 핀 운지버섯꽃
궁리에 궁리를 더하면
기적의 얼굴이 보인다

 

봄은 여름을 돌고 여름은 가을을 돌아
겨울로 이어져 둥그런 바퀴가 되고
바퀴가 이어져 굴러가듯이
되풀이되는 노래의 후렴같이

 

들판이 멀리서 배를 깔고 누워 있다가
푸른 하늘에 섞인다
하늘이 내 목을 칭칭 동여맨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서 있다

 

아름답다. “들판이 멀리서 배를 깔고 누워 있다가/ 푸른 하늘에 섞인다/ 하늘이 내 목을 칭칭 동여맨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서 있다”. 시인의 자각自覺은, 지금 저 건너편 시간의 정밀靜謐을 내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상한 일인데) 그의 시를 읽는 동안 이 세계가 한사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우리들을 밀쳐낸다. 왜냐하면, 의미와 실재의 거리는 멀고도 먼 현상의 강물을 건너야하기 때문이다. 시는, 그러므로 내 자신에 대한 탐색이 아닌, 힌두교의 예견력豫見力이 그랬던 것처럼 신神 부재의 인식에 머물도록 속삭인다[그렇다라도, 신을 믿는 행위는 값진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시인이란 무無를 신봉하는 자들이 아닌가. 무가 인생의 의미를 더욱 깊이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인생이든 물론 수많은 오류와 불운을 겪더라도 헛되이 낭비된 적은 없다. 오행론五行論으로 보면, 음양의 영측盈昃만이 교차될 뿐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죽은 나무에 꽃 피울 생각을 한다/ 고목 둥지에 핀 운지버섯꽃/ 궁리에 궁리를 더하면/ 기적의 얼굴이 보인다”. 삶의 운행은, 실상은 하늘의 28수宿의 궤도를 쫒아 움직인다[즉, 천체가 도는 것과 같은 규율/ 인체 경락經絡의 기氣도 이와 같이 돈다]. 내 운명은, 내 손바닥에 파인 손금처럼 움직인다.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기후는 먼저 달려와 요동을 치는 경우가 있다. 내 몸이 내 정신을 따르지 않을 경우, 그때는 어김없이 병마病魔가 찾아온다. 그러므로 정신의 분잡紛雜을 지워버리는 허공도 있어야 하지만, 정신을 살려내는 실유有實도 있어야 한다. 신은 우주의 주관자가 아니긴 해도. 인간의 부적절한 과욕의 주제자로 간주될 수는 있다. 시인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내 목을 칭칭 동여맨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서 있다”. 좋은 시라고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공훈功勳보다는 시간의 생기生起를 찾아 바삐 문밖으로 나서야 하리라. 시간은 하늘의 쟁반 속에 담겨 있는 것[즉, 하늘의 시간은 그러기에 x축 곁에 멍석처럼 깔려있지 않고, y축 위에 벽돌처럼 쌓여있다]. 시간적으로는, 그러니까 끝이 없는 무극無極[즉, 태허太虛]만 나타날 따름이다. 나는 이것을, 니체(F.Nietzsche 1844년~1900년)가 말하는 영원회귀라고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란, 결국은 막다른 골목[즉, 아포리아aporia]일 뿐이다. 그런데 김규화 시인의 ‘사건 / 사물’ 들은, 돌연 그 시간 위에 점선을 찍는 변물變物로 나타난다[즉, “내가 하는 일에 두 주먹을 쥐고/ 발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다 보면/ 기쁨과 마주하게 된다” (「믿는 것 옳은 것」), “아, 보면 보라지, 쳐다보는 것이 잘못이지/ 등나무는 더 갈등이 생기기 전에 말을 내려놓는다” (「모월모일의 갈등」),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흐른다/ 흐르는 것은 모두 강으로 간다” (「양이 있는 풍경」), “나는 허공을 향해 팔매질을 한다/ 농밀한 달빛이 한바탕 소스라치더니/ 난간도 붙잡지 못하고 곤두박질이다” (「슈퍼문」), “죽음의 공포 소리도/ 작은 신음으로 바꾸어 놓는/ 네 벽 속의 명랑 주머니” (「그 사람」), “그러면 세상 모두 지나가나니/ 그렇게 살다가 흰나비 따라가는 것이니/ 흰나비는 여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그냥 그렇게」), “나뭇잎이 바르르 떨면/ 바위는 귀가 되어 듣는다” (「이데올로기」) 등등]. 그의 시는, 사변적이었지만 결코 결정론적인 논증에 물들지 않는다. 결정론을 부풀리게 되면, 그것은 자유의지 못지않은 환멸로 자랄 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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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화의 시편들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면서 범하기 쉬운 흠결을 씻어내는 세척제abstergent다. 그의 시를 읽다가 보면 내 자신이 부끄럽고, 그의 다른 시를 또 읽다가 보면 내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것은 대각에 서있는 자의 자의적인 판단이겠으나,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듯이 그의 시는 독자의 넋을 사로잡는다. 살아있는 님프들의 고향은 죽은 님프들의 고향이기도 하다(바슐라르 G.Bachelard 1884년~1962년, 『물과 꿈』). 삶이란 칙칙한 어둠으로 물들어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더 자주 성스런 시간의 위엄들로 가득 차있는 것. 자나 깨나 무의식의 무모순율에 따른 마음속 만월滿月을 먼 하늘 말없는 미래로 높이 띠워 올리곤 하지 않았던가. 내 삶을 바꾸어나가려는 결의는, 대지의 명령이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명확히 해두자. 우리는, 삶의 문제 앞에서라면 두 번 살지 못한다는 생각을 철저히 응시할 필요가 있다. 김규화 시인의 도저到底한 생활 반향反響이 그 점을 일러준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 「절벽이 말을 걸어온다」 (중간부분)를 이렇게 쓴다;

 

나는 항상 주춤거리다가
절벽까지 밀리어오고
너그럽게 싸르륵 받아들이자고 싸르륵
허공이 밀물질하며 말을 걸어온다
그에게 매달려 시간을 줄이며
허공에 구멍 하나 뚫어놓는다

 

시간은 매순간이 궁극이었다. 마침내 그의 시는, 상감象嵌과도 같이 인생의 겸허한 깨우침을 “절벽”[이는, 남편의 임종을 감내해내는 전치前置였겠지만]과 “허공”의 염결성廉潔性 속에다가 깊이 늑석勒石해 놓는다. 그것은 내 마음을 청궁淸躬[즉, 맑은 몸]의 물방울로 닦아낸 자의 온유함이었다[즉, “그에게 매달려 시간을 줄이며/ (나는) 허공에 구멍 하나 뚫어놓는다”]. 이때는 실제로도 하늘과 내 마음의 속내가 다르지 않다는 숨결로 호흡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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